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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난의 타작마당...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성전의 정확한 위치가 궁금합니다.제가 알기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의 위치가
오르난의 타작마당...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성전의 정확한 위치가 궁금합니다.제가 알기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의 위치가
오르난의 타작마당과 성전의 정확한 위치가 궁금합니다.제가 알기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의 위치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모리아 산이랑 같은 위치인데정확히 그 위치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것이 아닌가요?솔로몬 성전 이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 포로 때 성전이 재건 되었고또 헤롯이 성전을 재건을 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성전에 위치가 바뀌었나요??첨부한 사진, 라이프 성경사전에 써있는 것처럼예루살렘 성밖 북쪽에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었던건가요?그렇다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이 세워진 것이 아니지 않나요??참고할만한 문헌이나 논문들도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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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는 한번 정해지고 나서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슬람 사원이 있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주후 70년 경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에는 헤롯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포로기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세운 스룹바벨 성전이 있었고, 그 전에는 맨 처음 세운 솔로몬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있었던 자리구요. 다윗이 값을 치루고 산 곳입니다. 그 전에는 기브아 산당에 회막으로 있었습니다.
[왕상]6: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왕상]6:2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며
[대하]1:1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가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사 심히 창대하게 하시니라
[대하]1:2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하여
[대하]1:3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3:2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넷째 해 둘째 달 둘째 날 건축을 시작하였더라
라이프성경사전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
예루살렘 성밖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에 있던 타작마당(삼하 24:16). 이곳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 산과 동일한 곳으로 보며(창 22:2), 다윗이 번제를 드린 장소로서(대상 21:15-22:1), 훗날 솔로몬이 이곳에 성전을 건축하게 된다(대하 3:1).
[네이버 지식백과]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라이프성경사전
모리아[ Moriah ]
‘여호와의 계시’란 뜻.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산(창 22:2). 브엘세바에서 대략 3일 거리(약 80㎞)에 위치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예루살렘의 북동편 언덕과 동일한 곳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대하 3:1). 그렇다면 이곳은 다윗 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있던 곳과도 일치한다(삼하 24:16-25). → ‘성경의 산들’을 보라.
[네이버 지식백과] 모리아 [Moriah]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두산백과
성전산[ Temple mount, mount Moriah ]
요약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산으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image
예루살렘 성과 바위사원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이자, 예루살렘에서 가장 의미있는 역사적, 종교적 장소로서,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1/6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가리킨다. 그 규모는 서쪽 길이 490m, 동쪽은 474m, 북쪽은 321m, 남쪽은 283m 에 이른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모리아 산(Mount Moriah)’으로 불리는 성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사로 바치려 했던 산이며(창세기 22),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많은 관련이 있는 장소이며, 이슬람에서는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와 함께 3대 성지로 여겨진다.
구약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B.C.1000년경 다윗 왕이 성전산을 그 땅의 주인 아라우나로 부터 은 50세겔을 주고 구입하였고(사무엘하 24:18-25), 그의 아들 솔로몬이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성전산에 화려한 궁전과 성전을 세웠다. 그러나 B.C.586이곳을 침략한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B.C.605-B.C.562 재위)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바빌로니아로 유배되었다. 50년 뒤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소규모로 성전 재건을 시작했다. B.C.516년에 완공된 이 성전을 제2성전이라고 부른다.
B.C.19년 헤롯왕(HerodⅠ, B.C.37-B.C.4 재위)이 유대인의 민심을 얻기 위해 기존의 성전을 헐고 대규모의 성전, 부속 건물, 요새 등을 세우며 과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A.D.70년에 로마의 티토(Tit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서에 따르면 당시 성전 파괴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고 한다(마태복음 24:2, 마가복음 13:1-2, 누가복음 21:5-6). 성전 터엔 A.D.135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주피터에게 봉헌하는 신전이 세워졌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이곳이 유대교의 성전터라 하여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A.D.638년부터 예루살렘을 통치한 무슬림에 의해 성전산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슬람 전통에 의하면 이 곳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로 여겨지며 이 곳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현존하는 8각형의 아름다운 건축물인 바위사원은 우마미야조 칼리프 압둘 말리크(Abd al-Malik ibn Marwan, 685-705 재위)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691년에 완공된 것이다. 사원의 돔 아래에는 높이 1.8,m, 폭 11m의 바위가 있다. 유대인들은 이 바위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신에게 바치려 했다고 믿는다. 반면 무슬림들은 아브라함이 바치고자 한 아들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이라고 믿으며,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 바위에서 승천했다고 믿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전산 [Temple mount, mount Moriah]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http://www2.fgnews.co.kr/html/2020/0202/20020209561817110000.htm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2.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 마당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영원한 이스라엘의 번제단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야훼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야훼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24:16)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걸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 다윗의 인구 조사로 인해 하루에 7만 명이 죽는 재앙이 멈춘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 솔로몬이 7년에 걸쳐 건축했던 솔로몬성전,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모두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다.
1) 예루살렘의 시작 모리아산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도성의 이름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수많은 전쟁과 파괴와 살육을 겪은 도시이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보다는 오히려 평화를 갈망하는 도시라는 뜻이 더 어울릴 듯하다. 예루살렘은 현재 국제법상 어느 국가의 소유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소유도 팔레스타인의 소유도 아닌 하나님의 도성이다.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민족이 전 세계로 흩어지며 조상의 땅, 조상의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의 팔레스타인의 지배가 끝난 1948년 5월 14일, 유대력 5708년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있는 이야르월에 UN의 결의에 따라 옛 조상들의 땅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건립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됐을 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이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여서 유엔은 예루살렘을 어느 국가 어느 종교 어느 단체의 소유가 아닌 중립지대로 남겨 두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항구도시 텔아비브(Tel Aviv, 봄의 언덕)가 되었다. 텔아비브의 성경 지명은 욥바이며 이곳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배를 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욘 1:3).
이후 흔히 6일 전쟁이라고 부르는 제3차 중동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요르단으로부터는 동예루살렘과 요단강 서안 지구를, 이집트로부터 가자 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빼앗았고 이때부터 예루살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UN 결의안 181'에 따라 예루살렘을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국제 관리 지구'로,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도성으로 남겨 두었는데 이스라엘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갈등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우리나라 북한산(해발 836m)보다 조금 낮은 해발 780m의 산지이다. 사해에서 서북쪽으로 약 28㎞를 달리면 예루살렘이 나타난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가 이어진다. 예루살렘이 산지이기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에서도 강도 만난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간다고 말씀하고 있고, 제자들도 엠마오로 내려가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이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창 22: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바위산에 불과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창 22:2). 이삭을 바쳤던 거룩한 장소 모리아 산은 이후에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됐다.
2)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 마당과 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의 일생에 두 번의 큰 실수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덮고자 충실한 장수였던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방에 나가 싸우게 하여 죽게 한 것이다(삼하 11~12장).
또 하나는 인구 조사이다(삼하 24장; 대상 21장). 왕으로서 전쟁에 나갈 인구를 조사한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탄이 다윗의 마음을 충동해서 인구조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고(대상 21:1),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후에 스스로 자책했다(삼하 24:10)는 것으로 봐서 순수한 의도에서 인구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윗은 세가지 하나님의 징벌 가운데 하나를 택했고 전염병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퍼져 7만 명이 죽었다(삼하 24:15; 대상 21:14).
죽음의 그림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천사에게 명하셔서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하에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징벌을 멈춘 곳을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삼하 24:16)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상에서는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대상 21:15). 성경 두 곳이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풀기 힘든 성경의 난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아라우나와 오르난은 같은 단어이다. 여기에 다른 모음부호가 붙여져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것뿐이다.
사무엘하 24장 15절은 그날에 아침부터 시작해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이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7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하신 때라는 것은 보통 제사 때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한 3일을 다 채운 것이 아니라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 제사 때에 전염병을 멈췄다는 말이다. 얼마나 심했던지 하루 낮 시간 동안 7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무시무시한 징벌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던 곳,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으신(창 22:17) 곳에서 멈췄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라우나(오르나)의 타작 마당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던 것 같다.
3) 다윗이 쌓은 단과 솔로몬의 성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모리아산, 아브라함은 아마도 그 장소가 얼마나 거룩한 곳인지 그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이 될지 그의 생애동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제단을 쌓았던 곳에서 수천 년이 지나 다윗이 다시 제단을 쌓았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벌을 멈추신 것에 대한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삼하 24:18~19; 대상 21:22). 하나님께서 다윗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가 쌓은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대상 21:26). 다윗은 이곳을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질 곳, 영원한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고 선포한다(대상 22:1). 그의 말에 따라 솔로몬이 그곳에 7년 동안 성전을 짓게 되는데 역대하 3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야훼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야훼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던 곳에,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회복이 이루어지던 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다. 그러나 유대교의 타락과 율법으로 변질되어 성전은 무너졌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위한 영원한 성소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갈보리 언덕에 다시 세워졌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73
예루살렘의 성전산은 왜
최고의 분쟁 지역이 됐나 image
예루살렘 구시가지 전경. 황금돔 사원이 있는 곳이 성전산 중심이다. ⓒphoto 셔터스톡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성전산(聖殿山·Temple Mount)을 꼭 찾는다. 사실 산이라는 느낌은 없고 대략 동서로 300m, 남북으로 500m 정도인 마름모꼴 광장이다. 중심에는 황금돔 이슬람사원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성전산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최고 화약고다. “성전산에서 갈등이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을 통해 요르단으로부터 예루살렘과 성전산을 탈환했다. 하지만 이미 이슬람 성지가 된 성전산을 강제 접수하기에는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운영은 요르단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공공재단 와크프(WAQF)가 맡고 이스라엘 경찰은 외곽경비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충돌이 잦다.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리쿠드당 당수가 돌연 성전산을 방문하자 팔레스타인의 2차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벌어졌다. image
“여기서 갈등 커지면 제3차 세계대전”
최근 발생한 유혈사태도 성전산에서 비롯됐다. 당초 유대인 정착촌 셰이크 자라의 팔레스타인 퇴거 재판에서 이스라엘 법원이 이스라엘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팔레스타인 측 시위가 잦아진 가운데, 라마단을 맞아 성전산 알아크사사원에 모인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이스라엘 경찰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가 성전산에서 이스라엘 경찰에 철수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먼저 로켓을 발사했고 양측 충돌은 격화되었다.
도대체 3대 유일신 종교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 성지로 여기는 성전산이 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약고가 되었을까. 유대교에서 성전산은 아담과 노아가 밟았던 땅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주된 사역이 벌어진 무대이다.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하늘을 다녀왔다는 전승에 따라 지어진 2개 사원이 자리 잡고 있어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 구약성경에 따르면 BC 1000년경 다윗 왕이 아라우나로부터 은 50세겔(일반 노동자 200일의 품삯)에 성전산(당시에는 타작 마당)을 구입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BC 960년 그곳에 제1성전을 세웠다. 하지만 BC 586년 바빌론의 침공으로 제1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대거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50년 뒤 돌아온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의 지휘로 성전 재건을 시작했고 BC 516년 제2성전을 완공했다.
시간이 흘러 BC 20년, 유대인이 아닌 에돔 사람으로 로마의 분봉왕(分封王·Tetrarch) 노릇을 하던 헤롯은 유대인의 민심을 얻으려고 성전과 부속건물을 화려하게 신증축했다. 땅도 지금처럼 평평하게 골랐다. 하지만 AD 70년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 타이투스 장군은 제2성전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예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부서져버렸고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로마가 파괴, 이슬람이 화려하게 부활
이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성전산에다 주피터신전을 세웠고, 이후 비잔틴시대에도 유대교의 성전터였다는 이유로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성전산의 이슬람시대가 화려하게 열렸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40세인 AD 610년부터 계시를 받고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본거지를 옮기면서(히즈라) 독자적인 종교로 발돋움했다. 이후 포교를 위해 주변에 대한 무력정복을 병행했는데, 632년 무함마드 사후 확장세는 더욱 빨라졌다.
638년 예루살렘과 성전산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는 코란 17장1절에 나오는 ‘알라의 종을 밤새 메카 사원에서 아득히 먼 사원으로 데려갔다’는 구절의 ‘아득히 먼(알아크사·Al-Aqsa)’ 장소를 예루살렘이라고 특정하게 된다. 당시 무함마드 후계자인 칼리프들의 경쟁이 치열했는데, 시리아 다마스커스에 본거지를 둔 우마이야 왕조가 메카 지역 칼리프에 맞서 예루살렘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 우마이야 왕조의 5대 칼리프인 압둘 말리크는 691년 8각형의 바위사원(Dome of the Rock)을 세웠다. 돔 아래에는 폭 10m가 넘는 바위가 있는데 무함마드가 야간비행을 통해 메카에서 날아와 이 바위를 딛고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몇 년 뒤에는 바위사원 남쪽에다 알아크사사원을 추가로 지었다.
바위사원은 1099년 십자군 시대에 교회(템플럼 도미니)로 잠시 바뀌었으나 1187년 다시 이슬람 손으로 들어갔다. 20세기 들어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사재 650만달러를 털어 24K의 순금으로 1200장의 얇은 판을 바위사원에 씌웠다. 이제 명실상부한 황금돔이 되어 예루살렘을 압도하는 포토존이 되었다. image
성전산 중심에 있는 황금돔 이슬람사원. ⓒphoto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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